아시아경제 생명 칼럼

[김재호의 생명이야기]<97> 암 가족력을 무력화시키는 가족문화

사랑과 생명 2018. 5. 25. 14:01

[김재호의 생명이야기]<97> 암 가족력을 무력화시키는 가족문화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몇 년 전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37세에 유방 절제수술을 받았고, 2년 뒤에는 난소와 나팔관 절제수술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각각 56세와 41세에 모두 난소암으로 사망하였고, 이모는 61세에 유방암으로 사망하였으며, 그녀는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50%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암은 유전될까? 어떤 집안에는 암에 걸린 사람이 유난히 많아서 암도 유전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흔히 이를 가족력으로 설명한다. 엄밀히 말하면 암은 유전병처럼 환자의 자녀에게 직접 유전되는 병은 아니지만, 부모의 난자나 정자에 들어있는 변질된 유전자가 자녀에게 유전되면 암에 걸릴 위험은 높아진다.

인간의 세포에 들어있는 약 25,000개의 유전자 가운데 암세포는 보통 여섯 개 이상의 유전자가 변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암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가지 형태의 유전자가 있다. 하나는 종양 촉진 유전자(oncogenes)이고, 다른 하나는 종양 억제 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s)다.

세포에는 세포의 정상적인 성장을 도와주는 유전자가 있는데, 세포의 분열이 필요할 때만 활성화되어야 할 이 유전자가 변질되어 항상 활성화되어 있으면 세포를 지나치게 성장하게 만드는 종양 촉진 유전자가 되어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종양 억제 유전자는 세포의 분열을 늦추고, 손상된 DNA를 수리하며, 건강하지 않은 세포의 자멸을 돕는 유전자인데, 이 유전자가 변질되어 종양의 성장을 억제하는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TP53 유전자를 포함한 100여종의 종양 억제 유전자 가운데 BRCA 유전자가 변질되어 잘 활성화되지 않으면 유방암과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데, 변질된 BRCA 유전자가 부모로부터 유전될 수도 있고, 출생 이후에 이 유전자가 변질될 수도 있다. 안젤리나 졸리는 가족력으로 볼 때 부모로부터 변질된 BRCA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력을 유전으로만 해석하면 질병의 원인을 오해할 소지가 있다. 가족들은 환경과 생활습관을 포함한 많은 요소들도 공유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가족들의 각종 질병에 큰 영향을 주며, 암도 마찬가지다. 종양 촉진 유전자와 변질된 종양 억제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지만, 같은 생활환경 때문에 후천적으로 가족들에게 동일한 유전자 변질이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가정에 암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에는 선천적인 경우와 후천적인 경우가 혼재하는데, 선천적인 경우는 많지 않고, 후천적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질된 유전자가 암의 원인인 경우는 미국 5~10%, 영국 2~3%로 추정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암은 후천적으로 변질된 유전자 때문으로 추정한다.

미국과 영국의 사례로 볼 때 우리나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질된 유전자 때문에 암에 걸리는 비율은 높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가족에서 암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흡연이나 음주와 같이 종양 촉진 유전자를 많이 만들고, 종양 억제 유전자를 변질시키는 ‘암 도우미’ 생활을 가족이 함께하기 때문인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유난히 암에 많이 걸리는 가족이 있다면 가족력이라는 단어에 기죽지 말고, 종양 억제 유전자를 변질시키는 생활요소를 찾아내 개선하는 ‘건강한 가족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처럼 변질된 종양 억제 유전자를 타고나더라도 발암물질에의 노출을 줄이고, ‘암 도우미’의 생활을 버리며, ‘생명 도우미’의 삶을 생활화하면 우리 몸은 우리에게 암 예방으로 보답할 것이다.

김재호 KB자산운용 상근감사위원

http://cm.asiae.co.kr/view.htm?no=2018052509323843625